시詩를 쓰다
창가에 다가온 햇살이 시(詩 poem)를 쓰라고 한다. 대면하면 눈이 부시다. 창밖에서 한글 해례본에 없는 문자로 신호를 보낸다. 해의 언어는 빛이다. 창문에 어린 빛을 읽고 나는 컴퓨터 화면을 연다. 한글 앱을 불러온다. 그리고 자판을 두드린다. '햇살이 등을 민다/ 눈부신 날은 지금이다/ 사랑을 전하려면/ 빛으로 써라/ 온몸이 빛날 것이다.'
때로는 새벽 달이 시 좀 쓰라고 한다. 남향 창으로 들어온 달이 거실 바닥에 A3 크기의 미농지를 편다. 명상을 멈추고 달빛 문자로 쓰란다. 달빛에는 푸른 밤이 묻어 있다. 문자 색이 어슴프레하다. 달빛 스민 미농지에 옛 글자가 뜬다. 스물여덟자 한글 중에 사라진 아래하, 반치음, 옛이응, 여린 히읗 'ㆍ','ㅿ','ㆁ','ㆆ'을 닮았다. 생각만 해도 뇌파(腦波)를 감지하 듯 써진다. 한글 앱 회면에 옮겨 적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집앞 소방도로 길가에 핀 씀바귀 꽃이 눈짓 할 때가 있다. 미소 띈 언어에 음절이 꽃잎이다. 미소를 읽으면 그 문자 색이 퍼머넌트 엘로우( permanen yellow)다. 달빛 머금은 달맞이꽃을 생각나게 한다. 산책길에서 손짓하는 달맞이꽃이 시 한수 읊어 봐요, 할 때처럼 씀바귀 꽃은 갓길 어디서나 시어(詩語)를 풍긴다. 차들이 매연을 토하며 지나가도 와해되지 않는 언어다. 내 걸음 사이사이 한 낱말 한 소절 머릿속에 적는다. 윈도우 문서 화면에 옮길 때면 지나온 갓길의 연석(緣石) 마디마디가 시문(詩文)이다.
의류 광고 모델의 플라루어 쉬폰 원피스 자락이 옆구리 쿡 지를 때도 있다. 엄마와 누나가 곁으로 지나가고, 까마득히 잊었던 어린 시절 옆집의 소녀까지 치맛단의 봄바람처럼 전두엽 이마에서 나부낀다. 대뇌(大腦)한테 부탁하지 않아도 선명하고 유려하게 기억을 서술 시킨다. 기억의 가지마다 새순 같은 날말이 열린다. 햇살 같은 빛의 언어가 초록으로 물든다. 생각을 감정에 얹어 마구 자판 두드리다 보면, 창가에서 시심(詩心)을 닥달하던 햇살이 숨을 멈춘 채 왼쪽으로 창틀을 밀고 있다.
생활이 나를 속일 때, 슬픔이 쓰라고 윽박지르는 시가 있다. 그런 날은 잿빛 서쪽하늘에 노을이 붉다. 산을 넘어 지는 햇살이 울먹이는 문장이다. 어둠이 물들어가는 산아래 풍경이 의식의 늪에 잠겨 있던 니토(泥土)의 언어를 끌어 올린다. 삶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져 간다는 문장을 쓰게 한다. 멈출 때가 더 치열하다는 감정을 모질게 서술한다.
시를 쓴다는 건 살아지게 하는 힘이다. 불행을 주절대지 않게 한다. 역경을 미화하지 않는다. 살아지는 평안을 안겨준다. 삶의 햇살이다. 언제나 지금(現在)이다. 지금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안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