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보충대의 추억
강원도 춘천이었다. 홍천 고향집에서 출발하기 이틀 전날 마을 선배와 동료들이 베풀어 준 환송식(?)이 있었다. 노래와 술과 떠벌이 덕담이 자정을 넘겼지만, 출발 전날 밤은 뜬눈으로 사랑채 창호문에 어리는 달빛을 홀로 바라보았다. 홀홀단신 버스를 타고 춘천에 도착 입영 전야를 입대 동창들과 여관에서 보냈다. 도착하자마자 이발소에서 더벅머리를 자를 때, 이발소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 뭉치를 내려다보며 드디어 사회와 단절되는 기분이었다. 한밤의 소주 몇 잔으로도 감출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일반 사회인이 아닌 특수사회의 군인이 된다는 건 삶의 새로운 챕터였던 것이다.
징병검사 때였다. 표준 남자 키에 체중이 50kg 오차 범위 플러스 마이너스 2 밖에 안되는데도 '갑종' 판정을 받았다. 맨살 등을 짝! 갈기며 판정 선언을 하던 군의 관련 사내의 손바닥 감촉이 오히려 든든할 뿐이었다. 사나이로 판정해 주는 인증샷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사나이가 되고 나서 입영통지서를 받았을 때 그 건 출두 명령서와 다름없었다. 다만 '국방의 의무'라는 타이틀에 자부심이 곁들여져 있어 강제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입영 당일의 날이 밝자 뒤에서 잡아당기는 일반 사회의 술기운이 아무도 따라오지 않은 뒷곁을 아직도 차가운 3월의 아침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옷 밖은 추웠고, 몸 안은 긴장과 설렘으로 뜨거웠다. 가족들과 손을 잡고 함께 모여선 까까머리 장정은 아직 일반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지 않았다. 머리카락 긴 애인과 밀착해 서 있는 모습에는 소설에 묘사 되는 문장으로 서술될만 했다. 우두커니 혼자 대열속에 서 있는 내게 주변의 따뜻한 광경은 쓸쓸한 느낌이 차가운 아침공기와 함께 시린 목덜미를 휘감았다. 안내와 지침을 외쳐대는 행사 관련 군인의 목소리는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사회의 명령어 같았다. 학교 교련 시간에 경험한 제식훈련, 총검슬 따위의 예비 훈련상황은 입영상황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진짜 사나이의 길에 들어서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병역필(兵役必)'이 취직의 기본요건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같은 의미를 갖겠지만, 군에 다녀와야만 사람(남자)이 된다고 여기던 때였다. 군대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사나이라면 어떤 직종에서든 든든한 일꾼이 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훈훈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는 위정자들 중에서 군에도 다녀오지 않고, 국가 안보와 전력 강화 운운 할 때면, 웬지 어설푼 정견(政見)으로 느껴진다. '진짜 사나이'도 안되본 인물이 '충성'의 소총과 대포의 촉감을 신념에 대입할 수 있을까 저어되는 것이다. 일반 사회를 떠나서 군인사회로 들어가는 보충대의 시간을 시계 밖에서 거쳐보지 않고서는 가족의 손을 놓을 떄, 애인의 샴푸향 푸기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볼 때 느끼는 충성과 남자의 인간적 자부심을 자기의 소양에 채워넣지 못할 것이다.
암튼 보충대의 마당과 건물은 우리 집 주변과 아주 달랐으며 군인이 되기 위한 적절한 통과의례의 시니컬한 과정이었다.
.서툴고 어색하고 기대가 혼란스러운 보충대의 낮과 밤을 보내고 논산훈련소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 마치 서부전선으로 가는 비장함처럼, 하인리히 테오도어 뵐, Heinrich Theodor Böll1917-1985 독일)의 '휴가병열차 休暇兵列車 -열차는 정확했다 Der Zug war pünktlich)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기찻길을 따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혹은 아예 안 보이다가 다시 나타나며 승용차로 쫓아오는 가족을 향해 손을 흔들고 들리지도 않을 소리를 지르고...생생한 현장의 다큐멘터리였다. 그렇게 쫓아올 가족이 안 온 내게 그 광경은 전선으로 아들을 보내는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게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