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담우미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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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그림을 품고 그림은 글을 안고

글(文)

詩 6월을 보내며

담우淡友DAMWOO 2024. 6. 30. 19:15

바뀐 세월의 귀 언저리에서

 

                                     조성연

 

1

 

어렸을 때는

3학년 1학기

도덕책을 책가방에 넣으며

아비가 보초섰던 땅굴 얘기에

자랑스럽게 발표한

숙제를 마무리 짓던

코흘리개가 저렇게 커 버렸다

 

먼지를 투덕이며 달려오는

군화 소리 뒤로

넓은 연병장의 하늘이 파랗다

, 이거

엄마가 빚은 인절미다

같이 오려했지만

기침이 도져

먼 길 찬 새벽에

주저앉은 어젯밤

네 장거리 전화에

티슈 몇 장을 적셨다

이 말 하면서

3학년이 돼서도 잠자리서

엄마귀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가거든 아직도 밤마다

엄마 귀 필요하냐구

슬쩍 물어 보라고

 

아비 앞에서

충성! 하며

거수경례를 하는 얼룩무늬

이등병 얼굴은

애인 미스 강을 후방에 두고도

여전히 앳되건만

젖비린내 언뜻

군복 향기에 묻어나건만

거뭇한 콧수염 힘찬 숨결이

연병장 가장자리에 치솟은

포풀러처럼 기세 바르다

선뜻 전하지 못한 엄마의 말

그냥 삭이는 사이

군가 소리에 바람 흩어지는

연병장의 밝은 햇살이

아들 가진 아비의 눈에

더 눈부시다.

 

 

2

 

아비도 저 황토 위에서

충성을 배웠다

교련을 반대하다 들어와

팔꿈치와 무릎 까이며

전에는 국사 책갈피에서

막연히 떠돌던 조국이란 걸

온몸으로 처음 느꼈다

반대해서 물러서는 것이

국토가 아니며

외면해서 돌아서는 것이

조국이 아니며

부름을 받으면 달려가야 할 땅

생면부지 사내들과 살을 맞대고

뒹굴어야 할 땅인 것을

 

배우지 못하고 상사 계급장을 단

둘째 삼촌 보다더 늦게 알았다

휴학계를 내던

2학년 종강파티 날 까지도

꼬박 알 수 없었던

북풍에 이는 먼지조차

사랑해야 할 내가 바로

반공도덕은 빵점만 맞던

애였던 것을

교련복에 풀을 먹여

깃이나 세우고

플라스틱 모형 총이 무거워

오후의 플라타너스 그늘

벤치에 앉아 에스터데이에

노래에 몽상을 찾던

 

그런 내가 포풀러 바람소리

하늘을 찌르는 연병장에 와서

태극기 흰색이 선명한 아침과

취침나팔 아스라이

잠 속으로 멀어지며

몇 번인가 조국이란 실체를

대면했을 때

북으로 끌려 간 할아버지 때문에

소속 연대가 전방 근무로

들어가던 날

돌아온 신원조회에 떠밀려

아이스크림고지 외로이 앉은

철원평야

백마고지 두꺼비처럼 엎드린

우측으로 푸른 남기에 싸여

가까운 듯 먼 오성산 아래

피의 능선까지

들려 준 전우가 폭풍지뢰에

발목이 잘려 후송될 때까지

예비대대 소총중대 화기분대장하며

아무래도 난 온전히 이 땅을

누빌 수 없는 것일까

한 때는 좌절했었다

 

어렵사리 땅굴 지키는

특전을 받아

몇 번이고 굴속을 순찰하며

군사분계선 막장

철문 감시구로 분계선 너머

막막한 어둠을 보았다

어둡게 사는 저 쪽

그들 때문에

내가 배운 사격 솜씨가

유난히 빛났던 것을

각개전투 분대전술에 능한

분대장이었던 것을 알면서도

충성을 잘 모르던 때

결혼 미룬 채 네 엄마의

뱃속에서 네가 자랄 때

나는 다만 에 엄마와 너 때문에

충성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철모를 벗고

군대가 마지막으로 주는

검정 양말 두어 켤레 가방에 넣고

고향 앞으로 가며

다시는 이 쪽을 향해

오줌도 누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내가 충성을 마저 배우지 못하고 떠난

이 자리에 다시 너를 보내고

면회를 와서

충성 소리를 듣는다

 

 

3

 

입영 전날 일차로

충성을 맹세한

너의 목적격 여자

미스 강 말이다

여전히 머리칼이 길더라

네가 제대할 때까지

머리카락 한 올 자르지 않겠다며

면회 가는 내게

머리칼 한 줌 잘라 전하라더니

너 휴가 와서 보잰다

지금 면회 가면 괜히 몸만 달아

몸만 달아 충성이 마치

만나기 위한 멋진 구실이나

될까 보다고

야무진 염려에

토실하니 살집이 폈더라

 

가끔 네가 남기고 간

어릴 적 이부자리 지도 같은

네 방에 와서 청소를 하며

네가 웃고 있는 액자 속에

두 눈을 빠뜨리고

너무 조용해서 문을 열면

젖은 웃음이 이내

동그라미로 굴러와 아버님......

그래, 아가 면회 가서

네 미소 그대로 전하마

미스 강 그 애

네 엄마가 너를 뱄을 때

토실한 어여쁨이 있더니

그 애도 그렇게 벌써

너를 잉태하였더구나

우리가 그 애와 사이좋은 건

아무래도 네가 여기

먼지 구수한 연병장에서

키 큰 포풀러처럼 우뚝

서 있기 때문 아니냐.

 

이미 연좌제 끊어지고

할아버지가 생존하실지는

전설인양 하고

너의 충성 하나만으로

욕됨을 씻고 있지 않느냐

하나 밖에 모르는

고집불통에 끌려

너를 점찍은 미스 강

이후부터 너는

온전히 그랬으니

그래서 전방에 와

오성산 너머로 평강시의 밤

은은한 불빛을 보았댔으니

 

할아버지의 장한 손자

외로운 할머니의 묘비 앞에

넙죽 절하는 증손자

대를 이어 미스 강이 또

너를 낳으면

할아버지가 돌아와

할머니 옆에 묻힐 때까지

대대로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네가 여기서

위풍당당한 뜻이다

 

 

4

 

이제 다시

충성! 하며

되돌아가는 연병장 위로

너의 군화 소리는

어느 때 보다 든든하다

네 엄마가 궁금한 말

차마 묻지 못했지만

인절미에 목이 메인 것을

슬쩍 말할 것이다

엄마 귀 대신

미스 강의 눈빛이

키미테처럼 붙여진

바뀐 세월의 귀 언저리마다

네가 지키고 섰는 충성이

모두의 것인 줄을

책임지고 설명할 것이다

 

하도 오래 되어

굳어진 각도로

거수 경례 답례하며

파란 하늘 아래

연병장을 걸어가는

너의 기세 바른 충성을

면회실 유리창으로

흐뭇한 물기가 번질 때까지

바라본다

 

아들을 둔 아비의 부신 눈으로 본다.

 

 

 

 

1995년 제16회 호국문예당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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