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담우미술학원

글에서 그림이 태어나면 이야기가 되고 그림에서 글이 나오면 문장이 된다

글은 그림을 품고 그림은 글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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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집

간절한 습관으로 지은 전봇대 위의 집은 엉성했다 그러나 단단했다 22킬로 볼트의 전선이 건드리지 못한 채 지나갔고 변압기도 위치를 변경하지 못했다 더불어 살고 있었다 전기가 불편했다 전봇대를 세운 사람이 갈퀴와 사다리차를 몰고 왔다 퇴거 명령서도 없이 철거 명령만 집행했다 보상은 논의조차 없었다 출산을 앞둔 채 시골로 낙향한 그 해 늦여름 아스팔트가 산중 컨트리 클럽으로 기어가는 길섶 미루나무 가지에 풀냄새 짙은 나뭇가지로 흙을 묻혀 새 집을 지었다 엉성해 보였지만 단단해서 바람이 그냥 지나갔다 미루나무가 터를 내주었다 흔들릴 때 부서지지 않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세입자 수가 줄이든 공간이 광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텃세를 받기는커녕 달세도 약정하지 않았다 전세 계약서는 양식조차 없었다 눈비가 들러 손님으로..

2021.01.29

이 겨울에 비가 내리면

살얼음 거울에 비친 나르시시스트의 얼었던 손이 기지개를 켠다 엎드린 풀잎에 코끝을 얹고 벗어 든 마스크의 냄새를 맡다가 귀 옆 볼 아래 쯤 찬바람의 손톱에 할킨 입김을 만진다 구십사 에프 마스크로 덮은 입술이 말했다 목련나무 움이 틀 준비를 하면 어쩌지? 사하라 사막의 눈과 바뀐 게 아닐까? 도대체 내 입술 목젖 어디에 대는 질문이야 침방울 보다 더 축축한 내 마스크에서 풀냄새가 난다 얼음 위에서 내가 나를 만진 적이 있다 대부분 끈에 가 있었다 늘어났고 안개가 서렸으며 비는 가늘었다 코로나 겨울에도 초록빛 풀은 견딘다 그대로 봄이 오리라는 소리가 후둑 후드둑 떨어지면 나는 폐 두 쪽을 돌아나오는 숨을 마스크 안 쪽에 적는다 얼어 붙은 목덜미 뒤쪽으로 손을 넣어 머쓱한 희망의 귓등을 만진다.

2021.01.26

강설

지구에 천일 지난 애인을 둔 물방울이 구름 우주정거장에 머물고 있었다 아직 화성 보다 달에 먼저 가려면 햇살 모듈이 필요했다 지표면 복사열이 제작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번은 애인을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상까지 광범위하게 차가운 호흡의 강이 있었다 온도 마스크를 쓰고 들숨 날숨 건너다가 발이 얼었다 팔에 서리가 서렸다 온몸에 상고대가 피었을 때 여름에 홍수로 발광하던 애인은 빙판으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밤새 함께 얼어붙었다.

2021.01.13

가을 여자

그녀는 기타 속에 들어 있는 낙엽을 줍는다 낙엽 속에 들어 있는 악보를 읽는다 소리로 전달하기에는 기타 줄이 제격이다 기타 줄에 낙엽의 악보를 주입한다 기타는 수동이지만 발성은 자동이다 그녀는 기타가 자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기타를 치니까 기타가 노래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악보를 전송하고 기타는 수신한다 가을은 둘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왔다갔다 한다.

2019.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