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이 땅 위에 있음을 알리고, 연결 되어 대화를 할 수 있는 경로가 SNS LINE (홈페이지,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인그타그램) 뿐이었다. 나를 세상 안(어쩌면 진짜 세상 밖일지도)에 가둔 것은 지독한 결핍(缺乏deficiency)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밖 모든 활동에는 동전이 구르고 지폐가 펄럭였는데, 맘껏 굴려 볼 동전 하나, 바지랑대에 널어 나부낄만한 지폐 한 장 헌옷 빨래 만큼도 희망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 숭숭 뚫린 결핍의 삼베바지를 입고 늦가을 삭풍에 뛰어놀던 유년시절부터 서울로 간 학창시절 버스표(학생회수권) 떨어지면 20여 킬로미터 걸어기던 검정 교복 시절과 커피숍이나 카폐에 가는 건 사치스런 일탈로 밖에 여길 수 없었던 검정 물들인 사복의 석고뎃생 유화 추운 실기실의 시절까지 4B연필 한 자루, 유화 물감 한 통 두 번 다시 살 수 없는 빈한의 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실기 가운 한 벌 입지 못하고 유화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검정물들인 군복을 입고, 번들번들한 교수의 눈치를 보며 강의실, 실기실을 오갈 때, 유일한 위안을 주었던 건 문예창작과의 세미나 청강 혹은 시화전 관람이었다. 부학장이던 김동리( 1913-1995 소설가,시인) 어른을 교내 복도에서 우연히 만나면 꾸벅 인사를 주고받는 게 전부였지만, 그와 함께 한 건물에 있다는 것으로도 내 문장과 시어(詩語)는 유화 물감과 붓 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문창과의 작품발표회에 참석해 김동리의 시 낭송과 그의 부인 손소희( 1917-1987 소설가)의 소감을 듣던 날이 거억속에 뚜렷하듯이 나는 어쩌면 유화 캔버스에 막연한 시어를 물감으로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최영림( 崔榮林 1916~1985 전 서양화가 대학교수), 박영선( 朴泳善, 서양화가 1910 ~ 1994년) 등 노교수가 실기시간을 거쳐갔지만, 어느 유명세도 유화 붓 한 자루 나이프 한 자루가 내 자취생활비 보다 더 나가는 무게 때문에 속으로 타박하면서 그 길로 들어선 용기를 후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적군 식별을 위한 탱크나 무기 등을 자주 파견되어 그리던 군대를 거쳐 사회에 나오자 베니어판 한 장의 책상으로 시작한 미술교습에서 전세 건물을 얻어 미술학원을 열기까지 결핍의 수렁은 질척질척 늪지대 일변이었다. 달세집 전세집을 전전하며, 교육청(교육지원청)과의 팽팽한 신경줄 위에서 미술학원을 열고 살아가는 현실은 그나마 보기에 괜찮은 삶의 길섶이었다. 교육청 간섭은 언제나 송곳이었고, 과목이 다른 인근 학원의 어줍잖은 감독의 월권행위까지 견디는 동안 유일한 위안을 준 건 재력이나 수학능력을 따지지 않고 받아주는 글쓰기대회(문예백일장, 문예공모전) 등이었다. 문예(文藝 literature)에 대한 인연은 수차례 계속 되는 수상과 더불어 점점 깊어져갔다. 회화개인전( 繪畵個人展) 한 번 열 수 없었던 처지의 내게 문예작품은 삶의 대체 분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런 형편에 시작한 사회환원 의미의 미술재능기부 프로그램은 새로운 삶의 모멘텀(momentum)이었다. 어쩌면 부유하게 행위할 수 없었던 회화(繪畵) 활동에 대한 반대급부의 실천인 것 같았다. 오히려 기부활동을 통해 누리지 못했던 '미술행위의 보람)을 얻고 있었다. 현재의 마을에서 40여년 가까이 미술학원을 하면서 이룩한 삶의 여유 일부를 마을 사람들(미술학원에 자녀를 보내 준 학부형들)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실현한 후의 보람은 어떤 설명으로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나눌 수 있을 때, 되돌려 줄 수 있을 때, 그 시작은 작을 지라도 멀리 갈수록 드넓게 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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