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담우미술학원

글에서 그림이 태어나면 이야기가 되고 그림에서 글이 나오면 문장이 된다

글은 그림을 품고 그림은 글을 안고

2023/01 11

문득

평소와 같이 새벽 세 시 반에 깬 의식 속으로 꿈 반 생시 반의 고요가 흐른다. 현실은 베개 위지만, 의식은 잠의 결 속에 있다. '누워 있음'과 '일어나야 함' 사이에서 시간은 의식 밖에 있었고, 시작과 끝이 없는 적막이 빛도 없이 휘감겨 있었다. 왜 가만히 있을까 묻지 못한다. 깨어난 이유와 일어나야 할 명분도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은 곁에 있었지만, 오늘이 감지 되지 않았고, 내일은 더욱이나 기존하지 않았다. 뇌를 품은 머리가 베개 위에 있다 해도 뇌는 나를 알지 못하고, 머리조차 베개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베개 위에서 머리를 만지지 못한 채 '깨어남'의 옷고름을 붙잡고 있었다. 나를 낳은 엄마가 외가에 갈 때 억지로 떼 놓고 간 나의 머리가 구르지 않았고, 그 엄마가 곁에 없는 베갯머리는 어두..

글(文) 2023.01.27

설을 보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쇴고 쇠든 말든 그는 나를 지나갔다 내 곁 사람들의 곁을 우르르 비켜 갔다 스스로 가지 못했다 시계가 나열한 자연수를 따라 갔다 오름차순 반복에 막혀 하루를 쫓아갔다 하루도 버릇 같아 밤을 건너 낮에 발맘발맘 달력을 믿었나 보다 달력은 그가 올 날 머물 날 갈 날을 적어 놓았다 그는 빼먹지 않고 순서대로 짚어 갔다 쌓은 신뢰가 뚜렷하다 나는 달력 때문에 그가 온 걸 간 걸 알았다 하루 더 머문 사실도 목격했다 달력 때문에 머물 때 그가 지나간 내 곁 사람들도 모두 간 현실을 깨달았다 달력은 그를 붙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붙들지 못했다 술 잔 뒤에 커피 컵을 놓았지만 입 안대고 그는 갔다 그와 신뢰를 쌓지 못한 게 아쉽다 안 보이게 가슴 안에 그가 온 날 간 날 머문 날을 적..

2023.01.24 (1)

까치의 설

집앞 전신주 위의 까치 부부네 집에 구름 낀 새벽이 조용하다. 영하와 한풍이 행짜를 놓아도 설 아침은 전선을 타고 그 집에 온다. 까치의 설빔은 블랙 쉬폰 블라우스에 흰 카툰 스커트 차림의 아내와 같은 색의 슈트에 흰 바지 차림의 남편은 평상복 그대로다. 잠깐 내린 비로 클리닝을 하고 스쳐가는 눈송이로 먼지를 털었다. 평복 차림이 여느 때와 다르게 말쑥하다. 남편의 고향은 동쪽 골짜기 자작나무 숲 어느 우둠지다. 아내의 고향은 서쪽 지방도로변 미루나무 어느 꼭대기다. 아침엔 동쪽으로 세배를 갔다가 오후엔 서쪽으로 세배를 갈까. 정월 초입부터 베갯머리 갑론을박 치열했지만, 어느 쪽에도 부모님은 안 계신다. 막내작은 아버지와 큰 고모네 집에 액정화면 인사나 전하지. 새로 장만한 스마트 폰이 세뱃돈 만큼 깔끔..

글(文) 2023.01.21

설빔

水曜班의 수력(水力): 재능기부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그림교실 '설'은 있어 왔던 명분을 한 층 업 시킨다. 잠들지 않고 봄 여름 밖으로 나돌며 잠잠하다가 초가을 추석에 잠깐 세운다. 도토리 알밤 쫓아 구르다가 겨울 바람 따라 흰 눈 덮어 쓰고 지붕 위에 강설 쌓이듯 일어선다. 설날이 다가오면 어딘가에는 따뜻한 맘을 한 꾸러미 보내야 하고, 누구에겐가는 한 다발 눈꽃 같은 마음을 안겨야 한다. 그 명분을 '설'은 거부할 수 없는 의지로 내걸고 사람이니까 사람을 챙기라는 압력을 넣는다. 마음만 주면 손이 허전해 한과 한 상자, 곳감 한 꾸러미 심지어 건강기능 식약, 달걀 꾸러미에까지 압력을 넣는다. 물이 흐르듯 일상에서 특별한 날까지 마음 만큼 크고 푸른 명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금빛 설빔을 안겨 줄 대상이..

글(文) 2023.01.20

한설寒雪

눈(雪)은 눈(眼)을 가리며 내렸다. 발밑으로 가서 구두 밑창을 간질렀다. 구두보다 걸음이 더 깔깔거렸다. 눈은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은 눈이 싫었지만 눈이 없는 곳은 골방뿐이었다. 눈은 걸음을 따라 길끝까지 갔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걸음을 이끌고 개천을 건넜다. 나무에 슬쩍 어깨를 비비고 가지에 입도 얹었다. 눈의 입은 꽃방정이다. 나무 밑으로 가서 산부리를 간지른다. 산은 웃지 못하고 부처를 닮는다. 눈은 목어(木魚)를 두드린다. 산이 대신 참선(參禪)에 든다. 법문(法門) 솔깃한 눈은 산을 덮는다. 눈은 언어를 덮는다. 말 대신 바람을 읽는다. 어디까지 하애질지 망설인다. 눈이 내 걸음을 읽을 때쯤 나는 눈의 가슴을 본다. 피부는 차갑지만, 마음이 닿는다. 눈(雪)은 눈(眼)을 가리며 얼굴을 만..

2023.01.18

겨울 비

겨울이 젖고 있어요 흰 보숭이 원피스 입었다가 답답했나 봐요 하의 실종 차림에 소한(小寒) 전 후 이따금씩 흰 레깅스 껴입다가 내열 풍만한 온몸 거추장스러웠나요 어제 오늘 긴긴 밤 추륵추륵 냉수 마찰 샤워 중이어요 북방 어느 집 아낙들은 흰 패딩 입든 말든 날씬 늘씬 앙상 가지가지 자륵자륵 젖네요 우리 누나 맨발이 앞마당 질러 물을 튀겨요 엄마 버선발이 부엌문 넘어 축축하면 대청마루 눅눅해요 막내 누이 말꼬랑지 머리카락 된장국에 젖었고요 어머머 형수님 앞치마에 동백꽃이 붉어요 밤새 조잘대던 낙숫물 한 바가지 수돗가를 돌아가요 아침 냇가 빙판 녹은 맏손자 바짓단에 쯧쯔쯧 혀가 젖는 할머니도 웅크렸던 말씨가 터요 겨울이 저냥 마냥 젖습니다 봄(春)이라도 미리 불러 짝꿍 쪽꿍 skin to skin 하려는지 ..

글(文) 2023.01.15

설 앞

쌓아 두었던 예감이 소진하면 보고픈 고향의 인센티브 더 이상 지급 되지 않는 사랑 카드 연두 빛 황금비율 네모 안에 고속도로와 실개천이 굽이쳐 흐르는 귀향 기시감의 근처 그믐으로 가는 새벽 달이 밝다 저 달 깜빡 눈섶 지워지면 헤진 삼베 옷고름 고쳐 매는 어머니 코 삭은 버선발로 뒷짐 지는 아버지 시간이 휘는 중력 위로 나는 듯이 오실 텐데 움푹 꺼진 성간의 골짜기로 별이 흐르고 어느 먼지에 부착 되어 촛불 앞에 나앉으실지 켜켜이 메밀적 시루떡 무 나물 생전으로 등불 아래서 밤(栗)을 치던 기일의 저녁으로 홍동백서 조율이시 가득한 제기 돌아 돌아 향로 위로 연기 오르실지 아직 괘도 밖의 별이 되기 전 지구에서 멸치 미역 우린 물에 끓인 떡국 한 술 뜨는 그리움 삼헌작을 모아서 음복할 즐거움이 솟는다 섣달..

글(文) 2023.01.10

엄마 + 아빠=

이응이 발견 되기 전 시작된 엄마였다 수태한 한글이 꼼틀꼼틀 자랐을 때 미음을 낳기 전에 쌍비읍이 코에 닿았다 감기처럼 모음 '어'가 젖가슴 부르텄는데 콜록이면서 자음이 매번 또 매번 앞에 와서 콧날 찡 찌잉 비읍이 두 개로 보였다가 하나로 보였다가 원래 한글은 상록수였다 흔들릴 때 제대로 자랐기에 초성이 다른 바람이 불어오면 아빠는 비읍이 발견 되기 전 시작되었다 어느 날 별이 쏟아지는 밤에 한글 검색이 안 되는 시각에 무슨 받침을 베개 밑에 받쳐야 할지 구개음화가 전설모음으로 페이지를 넘었다 쉼표는 아예 서술 되지 않았다 폭풍우처럼 나열하던 느낌표 느낌표 느낌표 기록이 엄연해졌다 달이 그믐이었고 해가 아침이었을 때 빼기가 더하기 뒤에서 꿈틀꿈틀 봄을 적고 있었다.

글(文) 2023.01.07 (2)

내 옆에 나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를 가진 내가 있다. 움직이면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가 없는 내 곁의 내가 있다. 그림자 만큼 이동 간격 0.0 오차 없다. 눈짓 꼭 맞고 소리없이 딱 맞아, '곁에 있어!' 부른적 없지만, '저리가!' 가끔 있다. 이유 없이 싫은 나를 노려 보면, 오도카니 곁의 나. '어쩌면 좋니!' 이 걸 그냥 버린 적 종종 있다.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도 없이 버린 내 곁의 내가 내게 노려보면, 곁의 내가 본래의 나 보다 당당하다. 자랑할 만한 진짜를 '곁에 있어!' 한 적 없지만, '저리가!' 즉시 있다. 가짜가 된 나는 컴퓨터 앞에 간다. 생각을 넣으면 현실을 자각하는 화면이 마음을 서술한다. 한 번도 내게 '저리 가!' 없이 '곁에 있어!' 하지도 않는다. 화면과 나는 의식의 경계가 없다. 가..

글(文) 2023.01.0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