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담우미술학원

글에서 그림이 태어나면 이야기가 되고 그림에서 글이 나오면 문장이 된다

글은 그림을 품고 그림은 글을 안고

글(文)

직지천의 아침 풍경

담우淡友DAMWOO 2020. 6. 25. 01:38

페르권트가 길가에 나앉았다. 마스크도 안 쓴 입을 열고 곧추 앉아 있다. 가로수 나무가 우두커니 옆에 서 있는 건 서로 우두커니에 갇혀 있기 때문일까. 모짜르트가 저 하얀 치아를 입질하며 지나갔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가 검은 이빨을 부드럽게 핥은 적이 있을 것이다. 바이엘을 따라가던 고사리 손들이 저 입 속에서 음표를 파내던 시간의 자국이 생생한데 아침이 기지개 켜는 거리에서 우두커니에 몸을 맡긴 피아노 곁을 지난다.

 

경부선 철길 아래 굴다리를 가로질러 우회도로를 건너면, 황악산 골짜기서 발원한 계류가 직지사 경내를 질러 나와 중생들이 아기자기한 동네를 만지작거리며 내려온다. 잠깐 한눈을 팔겠지만, 추풍령 단전 아래서 출발한 직지천 중류와 손을 잡고 하류 천변에 이른다. 제딴에 서두른 눈친데 겨우 동쪽 하늘 초입에서 구름 필터에 가려 달처럼 떠 있는 해가 금부치다. 감히 마주 볼 수 없었던 얼굴을 빤히 쳐다 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눈부신 빛이 흘러내려 물 속으로 뚝뚝 용광로의 철물 번진다.

 

왜가리는 언제나 혼자다. 목이 긴 우아함을 전신에 입었지만 고독한 기운이 부리 끝에서 물 속에 잠긴 발끝까지 치렁치렁하다. 키 큰 부들 잎과 무슨 말을 주고 받는지 한참 요지부동이다. 나도 혼자다. 우아한 자세를 입지 못했지만, 왜가리를 바라보는 눈은 직선이다. 왜가리 주변을 감싸는 수면의 습기와 녹색 수초의 물그림자를........그들과 속삭이는 수면의 파동을 빗나가지 않고 본다. 피아노 건반을 더듬고 온 각막으로 물결의 음표가 찰랑인다. 

 

보(洑)의 수문을 빠져나가는 물살의 언행이 기운차다. 섬세하다. 문자로 짜놓는 언어의 나열이 아라베스크 무늬다. 물의 언행일치는 유사이래 가장 선명하고 맑다. 사람이 물을 마시고 씻고 탐독하는 이유다. 오염으로 썩어가도 물의 언어는 썩지 않는다. 물의 언성을 듣는 귀가 마침내 맑아지는 까닭이다.

 

해마다 준설공사를 해도 드러난 바닥에서 갈대가 자란다. 물의 언어를 듣고 자란 때문인지 섬세한 언어의 배열이 똑 닮았다. 날카롭지만, 푸르게 찌르는 촌철의 경구들이 허튼 받침 하나 없다. 바람결에 가끔 수선스러워지는 건 바람의 속성 때문이지 갈대는 휠망정 꺾이지 않은다. 그 언어의 숲을 스쳐가기만 해도 한 때의 아침이 인생의 전반을 관통한다. 

아침의 강변은 필독서 한 권이다. 산뜻한 느낌을 발견하면, 저녁에 일찍 퇴근하지  않아도 좋다. 코로나가 횡행해도 강변에 지랄하듯 나오는 건 하루를 읽는 첫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새로운 일상의 첫 장이기도 한 때문이다. 직지천의 수필은 오늘도 한 페이지 증편한다.

'글(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슬 아침  (0) 2020.07.05
두견이  (0) 2020.07.03
뻐꾹뻐꾹  (0) 2020.06.03
부르기만 해도- 詩  (0) 2020.05.31
Post-covidism  (0) 2020.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