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담우미술학원

글에서 그림이 태어나면 이야기가 되고 그림에서 글이 나오면 문장이 된다

글은 그림을 품고 그림은 글을 안고

24

꽃을 보는 시간

흰 눈이 볼을 얹자 붉게 피는 꽃 차가운 볼과 붉은 꽃잎 곁으로 삭풍이 후~ 바다를 건너와서 행짜를 놓는다 봄일랑 오거든 펴! 꽃에다 구실을 붙이다니 핑계 않고 볼을 얹은 눈이 희디 희다 설렁설렁 지나간 바람 뒤로 먼저 와서 말 없던 햇살 조용히 수은주를 밀어 올린다 꽃은 수줍기만 하다 다 끌어안고 붉기만 하다 봄이 오면 그 가 피울 꽃 이름 하나 무슨 깐으로 희든 붉든 노랐든 시간을 거머쥐지 않는 꽃을 본다.

2023.02.03

설을 보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쇴고 쇠든 말든 그는 나를 지나갔다 내 곁 사람들의 곁을 우르르 비켜 갔다 스스로 가지 못했다 시계가 나열한 자연수를 따라 갔다 오름차순 반복에 막혀 하루를 쫓아갔다 하루도 버릇 같아 밤을 건너 낮에 발맘발맘 달력을 믿었나 보다 달력은 그가 올 날 머물 날 갈 날을 적어 놓았다 그는 빼먹지 않고 순서대로 짚어 갔다 쌓은 신뢰가 뚜렷하다 나는 달력 때문에 그가 온 걸 간 걸 알았다 하루 더 머문 사실도 목격했다 달력 때문에 머물 때 그가 지나간 내 곁 사람들도 모두 간 현실을 깨달았다 달력은 그를 붙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붙들지 못했다 술 잔 뒤에 커피 컵을 놓았지만 입 안대고 그는 갔다 그와 신뢰를 쌓지 못한 게 아쉽다 안 보이게 가슴 안에 그가 온 날 간 날 머문 날을 적..

2023.01.24

한설寒雪

눈(雪)은 눈(眼)을 가리며 내렸다. 발밑으로 가서 구두 밑창을 간질렀다. 구두보다 걸음이 더 깔깔거렸다. 눈은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은 눈이 싫었지만 눈이 없는 곳은 골방뿐이었다. 눈은 걸음을 따라 길끝까지 갔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걸음을 이끌고 개천을 건넜다. 나무에 슬쩍 어깨를 비비고 가지에 입도 얹었다. 눈의 입은 꽃방정이다. 나무 밑으로 가서 산부리를 간지른다. 산은 웃지 못하고 부처를 닮는다. 눈은 목어(木魚)를 두드린다. 산이 대신 참선(參禪)에 든다. 법문(法門) 솔깃한 눈은 산을 덮는다. 눈은 언어를 덮는다. 말 대신 바람을 읽는다. 어디까지 하애질지 망설인다. 눈이 내 걸음을 읽을 때쯤 나는 눈의 가슴을 본다. 피부는 차갑지만, 마음이 닿는다. 눈(雪)은 눈(眼)을 가리며 얼굴을 만..

2023.01.18

CHRISTMAS가 오네

시내산 쪽에서 오면 기슭 왼쪽으로 능선을 타면 되겠지. 핀란드 오른쪽 마을에서 오면 순록에게 눈썰매 슬라이딩 부탁해. 엄마 산타 아빠산타 동반 곁에 아기 산타 태우면 되겠지. 마을 벗어나기 전에 언니 산타 손 흔들 때, 크리스마스 전야 남친 양말 사 놓았을까. 파리에서 출발하면 런던을 돌아 베네치아 들르면 꽤 괜찮겠지. 어느 골목 모퉁이 오호호 ! 웃음 한 보따리 메고 코리아 항공편으로 우랄산맥 넘으면 상하이 쯤 기름진 자장면 점심도 좋아. 영종도 터미날 부산한 기쁨이 눈이라도 펑펑하면 더 좋겠어. 뉴욕발 산타가 태평양을 건널 때면 로스앤젤레스 이모댁 소식도 따라와 아이패드 화상통화 불을 켜고 반짝반짝 화려한 아침이 밝을테니, 그녀, 아니 그, 혹은 그 분이 오면, 기어이 온다는데 오신다면 뭐 어쩌고 뭐..

2022.12.21

까치 집

간절한 습관으로 지은 전봇대 위의 집은 엉성했다 그러나 단단했다 22킬로 볼트의 전선이 건드리지 못한 채 지나갔고 변압기도 위치를 변경하지 못했다 더불어 살고 있었다 전기가 불편했다 전봇대를 세운 사람이 갈퀴와 사다리차를 몰고 왔다 퇴거 명령서도 없이 철거 명령만 집행했다 보상은 논의조차 없었다 출산을 앞둔 채 시골로 낙향한 그 해 늦여름 아스팔트가 산중 컨트리 클럽으로 기어가는 길섶 미루나무 가지에 풀냄새 짙은 나뭇가지로 흙을 묻혀 새 집을 지었다 엉성해 보였지만 단단해서 바람이 그냥 지나갔다 미루나무가 터를 내주었다 흔들릴 때 부서지지 않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세입자 수가 줄이든 공간이 광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텃세를 받기는커녕 달세도 약정하지 않았다 전세 계약서는 양식조차 없었다 눈비가 들러 손님으로..

2021.01.29

이 겨울에 비가 내리면

살얼음 거울에 비친 나르시시스트의 얼었던 손이 기지개를 켠다 엎드린 풀잎에 코끝을 얹고 벗어 든 마스크의 냄새를 맡다가 귀 옆 볼 아래 쯤 찬바람의 손톱에 할킨 입김을 만진다 구십사 에프 마스크로 덮은 입술이 말했다 목련나무 움이 틀 준비를 하면 어쩌지? 사하라 사막의 눈과 바뀐 게 아닐까? 도대체 내 입술 목젖 어디에 대는 질문이야 침방울 보다 더 축축한 내 마스크에서 풀냄새가 난다 얼음 위에서 내가 나를 만진 적이 있다 대부분 끈에 가 있었다 늘어났고 안개가 서렸으며 비는 가늘었다 코로나 겨울에도 초록빛 풀은 견딘다 그대로 봄이 오리라는 소리가 후둑 후드둑 떨어지면 나는 폐 두 쪽을 돌아나오는 숨을 마스크 안 쪽에 적는다 얼어 붙은 목덜미 뒤쪽으로 손을 넣어 머쓱한 희망의 귓등을 만진다.

2021.01.26

강설

지구에 천일 지난 애인을 둔 물방울이 구름 우주정거장에 머물고 있었다 아직 화성 보다 달에 먼저 가려면 햇살 모듈이 필요했다 지표면 복사열이 제작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번은 애인을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상까지 광범위하게 차가운 호흡의 강이 있었다 온도 마스크를 쓰고 들숨 날숨 건너다가 발이 얼었다 팔에 서리가 서렸다 온몸에 상고대가 피었을 때 여름에 홍수로 발광하던 애인은 빙판으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밤새 함께 얼어붙었다.

2021.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