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담우미술학원

글에서 그림이 태어나면 이야기가 되고 그림에서 글이 나오면 문장이 된다

글은 그림을 품고 그림은 글을 안고

글(文) 333

내 옆에 나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를 가진 내가 있다. 움직이면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가 없는 내 곁의 내가 있다. 그림자 만큼 이동 간격 0.0 오차 없다. 눈짓 꼭 맞고 소리없이 딱 맞아, '곁에 있어!' 부른적 없지만, '저리가!' 가끔 있다. 이유 없이 싫은 나를 노려 보면, 오도카니 곁의 나. '어쩌면 좋니!' 이 걸 그냥 버린 적 종종 있다.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도 없이 버린 내 곁의 내가 내게 노려보면, 곁의 내가 본래의 나 보다 당당하다. 자랑할 만한 진짜를 '곁에 있어!' 한 적 없지만, '저리가!' 즉시 있다. 가짜가 된 나는 컴퓨터 앞에 간다. 생각을 넣으면 현실을 자각하는 화면이 마음을 서술한다. 한 번도 내게 '저리 가!' 없이 '곁에 있어!' 하지도 않는다. 화면과 나는 의식의 경계가 없다. 가..

글(文) 2023.01.05

다시 한 해

바뀌지 않은 화면을 연다. 나 모르게 슬쩍 넘어간 달력을 인용한다. 0으로 시작하는 자연수가 안 보인다. 1부터 오름차순 첫 20023년 밤중이 어제 밤 자정 색깔, 불빛, 차가움, 새벽 2시, 책상, PC 아직 바뀌지 않았다. 뒷장이 남아 있는 책, 다 안 쓴 일기장 뒷면, 토끼 여럿 접다만 색종이가 있다. 콧물 닦은 가제와 스크랩한 신문에 17세기 명화, AI가 그린 작품이 여전히 눈을 뜨고 있다. 아르곤 만큼 많은 눈이 잠들기는 커녕 하품 조차 거르지 않는다. 나는 바로 어제 밤 맥주를 마셨으며 남은 맥아 성분이 병속에 있으며 바꾸지 않은 식탁 위에 멋진 상표가 한 모금 더 권하고 있다. 화면은 내가 열었고, 인용은 습관이었으며, 달력은 설명도 하지 않으며 확고했다. 에누리 없는 삶이 있었나. 고집..

글(文) 2023.01.01

세밑에는 촛불 켜자

해도 일찍 빛을 끄는 세밑 밤에는 조명을 끈다. 지나온 날들 중에 한 곳을 비추면, 드러나선 안 될 時와 時 사이, 分과 分 간격, 질러대는 시침 분침 따가와, 마구 미는 초침에 가쁜 숨이 드러나. 스폿 라이트 대신 촛불 하나 켠다. 책상의 둘레가 사각 방을 채우고 전등빛에 눈이 부셨던 책들이 깨어난다. 책은 친구가 아니다. 눈 안부신 촛눈에 눈을 크게 뜨고 내가 모르는 현재 시간 읽어 준다. 책의 언어는 구어체가 아닐 때, 문어체로 양양할 때 촛농도 조용히 흘러내린다. 책날개 모서리에 액상 크롬 철물로 다가와 글자에 힘을 싣는다. 나는 2022년 그 년한테 바람을 맞을 때 힘센 고딕체를 읽고, 그 년으로부터 키스를 당했을 때, 우아한 궁체로 입가를 서술한 것. 나는 그 플라우어 쉬폰 스커트 자락에 잠시..

글(文) 2022.12.31

또 한 사람 지구를 떠난 날

한국이 우물 같아서 샘은 끊이지 않지만 자기가 개구리 같이 눈만 커서 가로 세로 바다를 건너 다른 육지로 떠 돌던 그 당돌한 지구인 한 명 2미터까지 눈이 쌓이는 땅에서 회오리바람 하늘에 닿는 곳에서 여우도 머리를 제곳으로 두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곧장 폭풍우 구름 뜬 공중으로 떠난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지구인 한 명 70킬로그램 무게가 줄었는데 지구는 품질 한 칸 내려가지 않았네 공중에서 내려와 일흔 해 태양이 아침을 켜고 저녁을 끄는 동안 파티를 즐겼고 대륙횡단 기차 만큼 코를 골았고 지구 때문에 걸었으며 가끔 신경질도 냈는데 웃지도 않고 떠올랐네 별은 다시 뜨고 달은 밤을 켜는데 손전등 하나 없이 어두운 공중으로 출발했네 대륙 보다 큰 우물 밖으로 나갔네.

글(文) 2022.12.28

이미 기다리고 있어

아마 적도 근처 어느 무더운 숲이지. 갯내 나는 입으로 봄의 남풍을 후후 심술 건장하고 살갗 까무잡잡한 사내가 꽃으로 힐끗 불면 단전 하얀 그녀가 화려한 꽃무늬의 봄으로 스륵 태어나지. 민소매 쉬폰 꽃 원피스 샤르랑거리며 남지나 바다 위로 파도 거품 타고 맨발로 오지. 제주해협 서풍이 부는 쪽으로 해안에 당도한 그녀가 사근사근 걸음으로 나주평야 건너서 무등산을 넘으면, 추풍령 아래 소쿠리 지형 구석에 사는 나는 귀가 밝지. 아무리 가붓한 그녀의 몸이라도 기다리는 내 마음 보다 1그램도 안 무겁지. 서릿발 선 앞뜰과 성에 지도가 세계적인 창가에 사는 나는 그녀가 왜 오는지 전국적으로 온도를 살피지. 그녀의 체온이 빙점 언저리 빙빙 돌지라도 기다리는 거리는 서울 부산 사이 어느 휴게소에도 있지. 멈추지 않고..

글(文) 2022.12.27

세모歲暮the year-end

삼백 예순 번 해가 깍꿍깍꿍 하는 동안 나는 아직도 유년에 사라진 엄마의 젖무덤 앞에서 아장아장 서성인다. 훌쩍 커서, 다 커서 아빠가 엄마한테 나를 심어준 의도를 탯줄 만큼 싹둑, 응애 메아리가 밤나무 뒷산을 저녁 해처럼 넘어간 뒤, 뒤척이는 꿈 없이 깍꿍 해 따라 아침을 켤 땐데. 전설에 따르면 나는 한참 동안이나 울지 않았단다. 이놈의 자식이 세상 싫은가 보다 했는데 양수 찌꺼기 다 걷어낸 뒤 해가 깍꿍할 때 이빨 없는 목청을 동백 만큼 붉게 게워냈단다. 얼음에 베인 엄마의 발꿈치 만큼 짙게 필 모양이다 콧수염 검은 아빠가 희떱게 웃을 때 엄마는 연년 생 새끼들 앞에서 이 자슥들 어느 해에 다 어느 구석에서 떨어진 운동화로 차를 만들어 바깥마당을 도나, 물음표가 다섯 번째였다.나는 바퀴 두 개 보조..

글(文) 2022.12.26

올드랭 사인 Auld Lang Syne

겨울나그네60 2021. 12. 18. 14:47 연주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작곡하기 전에 애국가로 불렸던 노래. 나라를 잃고 떠돌던 시대에 이 구슬픈 곡조의 애국가는 뭇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을 것이다. 이제는 본래의 스코트랜드 민요로 석별의 정을 노래하고 있지만, 여전히 저물어 가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또 한 세월을 보내는 아쉬움의 심금을 울린다. 청아한 트럼펫 연주에 이어 허스키한 색소폰 음율이 가슴 저 밑에 묻혀져 있던 애수(哀愁)의 기억을 바늘로 티눈을 파내듯 끄집어 올린다. *안익태Ahn Eak-tai:1906.12.5 -1965.9.16.작곡가, 지휘자.우리나라의 국가 〈애국가〉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한국 환상곡Korea Fantasy〉 관현악 작품을 작곡. (일제치하에서 〈만주 환상곡〉,..

글(文) 2022.12.04

겨울을 기다리며

너의 품은 가을 빈 들 만큼 넓었지만 패딩을 입은 채로 안겨도 너는 맑고 투명하게 차가웠다 나는 양말을 벗지 않았고 누나가 털실로 짜 준 덧양말까지 신고 있었다 어머닌 목도리까지 감아 주며 네게서 옮아올 독감 그리고 코로나 변이바이러스까지 별소리에 담았을 때 나는 반짝반짝 예리해져 가는 너의 눈빛을 의심하지 않았다 빙점에서 눈금 하나 아래로 꿈쩍 않는 네게서 너의 가슴 더 아래 쪽 얼지 않은 샘 그 그믐밤에 졸졸 잠꼬대 흐르는 지점에 나의 비등점을 찍었다 네가 언젠가는 단잠을 깰 것이라고 나의 집적거리는 입질에 온기 어린 물길을 열 것이라고 네가 떠났다가 다시 와서 동지섣달 꽃잠을 자더라도 청보리 나부끼는 들 만큼 뒤척일 걸 의심하지 않았다 너의 앞섶 뒷섶 차가운 옷깃 모두 들추며 체온을 한 곳에 모은 ..

글(文) 2022.11.25

가을이 가는 길목

가을이 가면서 북동 쪽 북서 쪽 북북서 북북동 어느 길 어디로 가는지 길목에 홍시 열린 감나무가 있거든 길섶에 익어가는 참새귀리 재재거리거든 나 거기 서서 마음이 고파서 감 하나 먹고 아쉬움이 적막해서 귀리 이삭 하나 털며 선득하게 지나는 바람을 등으로 밀겠네 지상으로 내려가 가을 쓰기를 마친 낙엽 주워 화려했던 날들을 읽고 아직 나뭇가지에서 늦가을 채색하는 잎새의 마침표 서성이는 유채색 문장을 읽으며 나 거기서 한창 가을에 여물어간 사랑을 보겠네 가을이 슬며시 가고 있는 북북동동 북북서서 어느 산길 길섶에 피어 있는 소국 한송이 읽겠네.

글(文) 2022.11.23

낙엽 소리

시몬, 당신은 아는가 낙엽 날리는 송풍기 소리를 누군가에게는 낙엽이 치워야 할 계절의 잔재일 뿐 나무 아래 쌓이면 바람에도 날려가고 누군가는 발밑으로 조용히 낙엽 소리 듣는데 시몬, 당신은 좋은가 낙엽 몰아세우는 송풍기 소리를 나무 만큼 잎사귀를 단 적이 없어 잘 듣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낙엽 기계는 생각하지 못하고 입김을 세게 불 뿐이다 시몬, 당신은 기억하는가 낙엽 쓰는 싸리비 소리를 낙엽을 한 곳으로 모으는 빗자루의 소리가 쓸쓸할지라도 연기를 내며 매캐한 향기로 흩어지더라도 낙엽은 내려오기를 멈춘 적이 없으니 시몬, 당신은 잊었나 낙엽 밟는 맨발의 소리를 두 짝 귀 뿐인 사람은 듣지 못하는 낙엽의 말 여전히 가을이면 춘향전 완판본이듯 들려오는데.

글(文) 2022.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