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담우미술학원

글에서 그림이 태어나면 이야기가 되고 그림에서 글이 나오면 문장이 된다

글은 그림을 품고 그림은 글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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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명終命

죽음이란 내가 기억하는 나를 잊는 것 침묵 긴 개울이 몸 가운데로 흐르고 내가 어느 물가에서 머뭇거리든 어느 여울에서 맨발을 담갔든 내가 나를 기억하는 사철 저녁마다 잊을 수 없었던 개밥바라기를 바라보지도 노을에다 붉어진 눈을 붙여넣지도 그 때의 가슴 타는 순간에서 빛나던 내가 나를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내가 잊는 것 나를 기억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으며 언젠가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던 날들을 낱낱이 기억의 뒤편으로 밀어내며 내가 그들을 잊지 않았던 나의 됨됨이를 잊지 않으려고 애쓰던 아침과 한낮의 눈부신 기억에 대해 아, 그 게 나의 봄이었을지라도 가식 훌훌 벗어던졌던 여름날의 자맥질이었다는 것 얼음 아래 흐르는 도랑물조차 차가워지지 않는 언제 꽃이 피든 다시는 잊..

글(文) 2023.11.04

삶이란 내가 나를 기억하는 것 기억이 나를 부르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돌이켜보든 어느 순간 내일을 상상하든 내가 나를 기억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나를 거기에 가게 하고 머무르게 하고 기꺼이 이기적이게 하는 것이다 깜빡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바보 같이 보이더라도 내가 나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나를 잊은 사람들을 내가 기억하는 것 나를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언젠가 내가 그들을 생각했던 날들을 내가 기억할 때마다 눈에 슥 미소를 지으며 내가 그들을 잊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나를 까맣게 잊은 사실에 대해 후훗 가을 낙엽 같은 마음을 부스럭거리는 것 서리 눈발의 겨울이라도 가슴 훈훈하게 뒤척이는 것 잊지 않으면 기억이 단단해지는 생존과 이타 사이의 적응이다.

글(文) 2023.11.01

광주호 여행기

별뫼별곡 운율 따라 '엇던 디날 손이 星山(성산)의 머믈며셔' (어떤 지나가는 손님이 성산에 머물면서)... 내가 그 어떤 지나는 신객(新客)이 되어 프롤로그 나들이로 광주호를 찾았을 때는 11월 초순이었다. 가을 끝자락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살이 눈부시면서 따스했다. 추색 깊은 성산(星山별뫼) 숲에 별은 총총 박혀 있지 않았어도 대신 광주호 수면 위로 소슬바람에 이는 물비늘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차 밖으로 나오자 친구를 통해서 미리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상서로운 돌로 집을 삼은', 그 '샘물 흐르는 찻집'의 찻물 같은 여인과 함께 광주호의 상류를 마시고 자란 현지 태생의 동창 친구가 이정표처럼 서 있었다. 여기가 무등산 자락의 별뫼에서 광주호를 내려다보는 승지(勝地)라는 안내가 그들의 소..

글(文) 2023.10.13

밤(栗) a chestnut

https://damwoo1.tistory.com/15709190 민재 그 애가 세상 밖으로 어쩌면 우주 안으로 아주 떠난 뒤 기억 밖으로 어쩌면 관심 너머로 아주 가 버린 후 잊었지만 장담할 수 없을 때 가끔 기억나지만 그 건 바람이었을 때 시간의 마디였을 때 가을 크고 잘 여문 밤알 속에 여기 있었던 원자로 스미어 여기를 기억하는 양자로 입자로 가득 영글어 왔다 그림을 그리다가 떠난 아들 대신 그림을 이어 그리던 엄마의 손에 알알이 주워 전달 되었다 몸으로 올 수 없어 문자로도 전송할 수 없어 단단하고 윤기나는 밤톨 타임머신 타고 왔다 생생한 파일 안고 그 파일 여는 사람이 지구에 아직 사는 한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왔다 민재 여전히 까까머리 청년으로. https://damwoo1.tistory.c..

글(文) 2023.09.22

추석이 오면

나는 송편 빚던 손가락을 펴고 마주앉아 있던 얼굴 콧등에 반죽 한 점 얹겠네 그러면 미소가 매끄러워 떨어지는 반죽을 얼른 손바닥으로 받아 빚고 있던 송편에 비벼 넣겠네 솔잎 깐 시루에 쪄 내면 콧등 땀이 밴 맛이 나서 한 입 두 입 나눠 먹겠네 아직 더 남은 반죽에 마주앉아 있던 미소를 밤톨과 함께 소를 넣어 쪄내자마자 손바닥에 호호불며 식힌 다음 고소하게 부서지는 송편 속의 까르르 한 줌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계속 깨물어 부스겠네 이튿날 담장너머 이웃 집에 내용 안 밝히고 그냥 나눠 주겠네 추석이 와서.

글(文) 2023.09.20

해의 길

해가 황도(黃道)를 지나고 있어요 황홀한 시간이 흐르는 곳 길가에는 행성들이 주렁주렁 열리죠 한 알 한 알에 내린 햇살은 빛으로 익어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져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의 과수원이죠 땅의 복숭아 황도(黃桃)는 물결치는 섬유질과 맑은 눈길 해가 짚어 가는 풍경에 우리 마음은 벌과 나비처럼 모여 과일의 공기를 마시며 서로를 칭찬하는 모습이 따뜻해 감동을 주죠 신선한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선물해 줘요 해가 빛나는 대지에서 탐스러워지는 우리의 행성 잠시 그들을 보며 풍만을 즐기면 둥글게 부푼 모양과 안에 숨겨진 달콤한 추억이 우리의 소중한 감정으로 숨을 쉬고 있어요 땡볕 아래서 힘들어질 때도 있지만 그들 사이로 향긋한 생기를 몸에 받으며 우리의 마음이 점점 평온해져 갈 때면 해의 길에서 무르익는..

글(文) 2023.09.02

가을 전주곡

더위 속에서 가을이 수근거릴 때부터 '그립다'를 시작한 저 귀뚜리의 노래 처서의 밤이 서늘하도록 멈추지 않는다 짝꿍 하나 겨드랑 아래를 지나 새로 기다리는 것일까 한 번도 만나지 못해 헤매는 다리를 긁고 있는 것일까 맨발로 추분을 건너 입동에 목이 시려도 멈출 수 없었던 내 그리움의 문장이 섣달 그믐밤에 멎었을 때처럼 재도 얼마 후 피부 아릿한 음보의 노래를 마칠 건데 저렇게 긴긴 후렴 끝낼 줄 모르네 춘향전 완판본 저리 가라네 오선과 음표로 갈라 놓지 않았던들 목과 다리를 떼어 놓지 않았던들 사내와 여자를 갈라놓지 않았더라면 연주 되지 않았을 곡 저 노래 끝나면 나는 어느 해금 소리를 기다릴거나 가을 깊은 아쟁 소리 들을 거나 콘크리트 숲에서 울려 퍼지는 가을 야상곡들.

글(文) 2023.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