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담우미술학원

글에서 그림이 태어나면 이야기가 되고 그림에서 글이 나오면 문장이 된다

글은 그림을 품고 그림은 글을 안고

글(文) 331

옥상에서 커피 한 잔

옥상에서 커피 한 잔 해가 마스크 벗고 쏟아내는 볕이 뜨겁다 가을 한 낮 옥상 빨랫줄에 빨래를 널다가 카페를 발견했다 밝은 파랑 하늘과 탈지면 뜯어 놓은 듯한 양떼구름 그 아래 풍경 울타리 겹으로 친 산 줄기 꼭대기부터 노랑 빨강 주황 물감 들이는 나무들 멀고 가까운 집, 집, 집 눈앞 가까이 벽 모서리마다 자가 격리된 왕거미가 거미줄 식탁을 차리고 있다 얼른 내려가서 잽싸게 믹스 커피 스틱을 자르고 손잡이가 달린 컵에 털어 넣은 다음 포트에 끓인 물을 붓자마자 찰랑거리는 컵 안의 커피 수위를 가늠하며 다시 올라온다 잠자리가 비행 트랙을 지우고 있고 참새가 오선 채우지 못한 전선에 몸으로 짹짹짹 멜로디의 음표를 단다 비대면 따위를 무시한 바람이 선선히 지나간다 바람과 햇살과 구름을 드레싱한 커피 한 모금..

글(文) 2020.10.11

타향의 가을

고향 논에도 지금 쯤 벼가 익고 있겠지 겸손한 아버지 대신 자신만만한 맏형의 손에 자란 벼가 이견 없이 고개를 숙여 안으로 여물고 있겠지 벼멸구 견뎌낸 벼가 내면을 단단하게 채울 때 쯤에는 성숙한 메뚜기도 원숙한 몸짓으로 응원하고 방아깨비가 숙이네 정미소 전기 모터 소리를 낸다 뜸부기가 날지 않아 논바닥에 개구리밥 가득 띄우던 여름이 쓰름매미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뒷산 위로 올라가고 그 때 벼꽃은 지난해 가을 보다 눈부신 금빛 마련했을 것이다 코로나가 집앞 개울 건너 아스팔트 신작로를 따라 지나갔지만 마스크도 안 쓴 벼들은 마이삭 하이선 바이러스를 이겨 냈다 맏형이 아버지처럼 기대한 풍작을 암시하고 있었다 추석에 못 간 고향의 황금벌판을 타향의 논에다 펼쳐 놓았다 고향의 논에서 풍기던 벼이삭의 마른 풀 같..

글(文) 2020.10.03

추석의 치마폭

달이 동쪽에서 둥글어 갔다 저녁은 서쪽까지 열네 폭 펼쳐져 있었다 오토바이가 주문을 싣고 배달 쪽으로 달려갔고 쓸 말을 거르는 마스크가 어느 입에서나 당당했다 말은 웅얼거렸지만 상당히 정제 되어갔다 달과 저녁과 마스크 말의 배달 인터넷 뱅킹으로 효도를 일삼던 아들이 직접 오고 문자 끝에 발발거리는 이모티콘 매달던 딸이 오고 액정 화면 두바이에서 손 흔들던 사내가 건넌방에서 치마 끝을 당기지도 않고 자가 격리에 들었다 오늘의 과거와 현재가 내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달이 열다섯 폭 새벽 위에서 서쪽까지 둥글어졌다.

글(文) 2020.09.30

9월

9월은 일 년의 아홉 살이다 반바지를 입었고 정강이 만큼 자랐다 혹서를 견디면서 비대면 마스크를 썼지만 만나야 할 초순과 삭제할 하순이 치료의 대부분이었다 낫지 않는 기억이 한 배낭이었다 무거운 건 어깨 뿐만이 아니었다 가슴이 젖어서 하순까지 두 손이 내려왔다 추석 근처의 논두렁으로 가야 할 갈음 걸이와 중순에 닿는 발가락 열 개가 모두 시큰 거렸다 병충해 보다 회복이 느린 수해를 첨벙첨벙 아홉 살의 원두막에 없던 바나나가 바지 밑에서 불쑥 자랐다 여덟 살의 이별과 일곱 살의 갑작스런 키스 역순으로 완성 되어가는 성장 속에서 주저앉은 납골당의 정오는 눈이부셨다 울지 말라는 열매가 울긋불긋했다 9월의 아홉 살은 속으로 물드는 가을을 배낭에서 꺼낸다 첫 페이지가 마스크의 수필이다.

글(文) 2020.09.02

한 곁에 다른 한 곁이 다가왔다 한 겹으로 겹쳐도 둘이라고 할 때 나는 둘인 채로 한 겹이던 적이 있다 마음이 서늘했고 어깨 밑이 건지러웠다 새의 깃 만큼 자란 촉감이 길어져 날 것 같았고 힘을 더 넣어 한 겹을 유지했다 한 곁에서 다른 한 곁으로 떨어져 나갈 때 한 겹이었다가 두 겹이었던 적이 있었다 마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상대가 되어 우리가 둘인데 내가 다른 쪽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연했다 나는 늘 하나인 채로 둘이었다 애를 쓰고 싶었다 내 하나 곁으로 다른 한 곁이 다가왔을 때 둘인 체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수 개념을 털고 수학적 거리를 지웠다 삼십 센테 자가 발생했다 뿔자였으므로 부러뜨릴 수 있었다 다쳐서 둘인 채로 하나처럼 살기로 했다 아직도 하나인 채를 꿈꾸면서.

글(文) 2020.08.31

8월의 눈꽃

8월의 눈꽃 마음 갈피 사이로 가슴 페이지가 덮여 있을 때 마침 학교 울타리를 돌아가며 회화나무 아래를 건넌다 떨어지는 꽃잎 연달아 받아 적을 여분의 페이지가 있다면 눈을 마우스같이 연필로 쓴다 첫 눈이 오기까지 우선 매미가 노래를 마쳐야하고 닭들이 개들과 함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야 한다 사마귀와 메뚜기가 알 슬기를 완결해야 한다 집을 많이 가진 쥐들이 소방도로 건너 상가 뒤란으로 사라지고 휘파람새의 둥지에 몰래 낳은 뻐꾸기 알이 곡을 바꾸면 장마 냇가에 집 하나 가진 멧새도 새로 집을 볼 것이다 떨어진 꽃잎에서 밀어 찾아 뒤적이는 꿀벌의 독서가 한창일 때 그늘 뒤적이는 우리가 회화나무 어깨 너머로 읽는 팔월의 선득한 문장 폭염주의보 학자수(學者樹)가 비대면 클래스팅에 올리는 공지였다.

글(文) 2020.08.18

좋은 여름 날

좋은 여름 날 동쪽 하늘이 눈을 뜰 무렵에 강변 가는 산책 길 밤새 발로 차낸 듯 장마 뒤끝의 잿빛 구름 홑이불이 하늘 침대 한쪽으로 밀쳐져 있고 눈꼬리 아래로 쳐진 하현달도 아직 졸고 있었죠 더위 먹은 차도 이따금 동쪽으로 내닫는 시내 간선도로 전신주엔 광복절 태극기가 결려 있고 열대야(열 개의 대야) 분량의 물을 퍼붓던 사람들이 띄엄띄엄 오가고 있었죠 공원 길을 지나는데 울려퍼지는 가을 전령들의 합창 아는 이름 귀뚜라미 방울벌레 정도 뿐이지만 그 수가 십사 만 조금 넘는 이 작은 도시의 사람 수와 같을 거라는 짐작 그렇게 많은 전령들이 2020 가을 정기 공연을 펼치고 있었죠 나는 그저 표도 예매하지 않고 인터넷 검색도 하지 않은 채 익히 아는 공연 내용 그러면서도 느닷없이 듣는 노래처럼 막 깨어나 ..

글(文) 2020.08.15

미스터 팝 매미 오디션

2020 미스터 팝 매미 오디션이 열렸다 참매미가 선두로 본선에 진출했다 작년엔 말매미가 선두를 장식하더니 올해는 입추가 지나고 말복 코 앞에서야 등장한다 예선에서 턱걸이한 것일까 뒤이어 애매미가 본선에 오르고 쓰름매미 털매미 저녁매미가 참가 예정을 다듬고 있다 참매미의 맑고 밝은 목소리는 화창한 한낮에 듣기 좋다 애매미의 가창력은 조금 먼 숲에서 들려올 때 덜 방정스럽다 쓰름매미가 한적한 시골길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노래할 때 생각나는 고향 집 툇마루에 옥수수로 하모니카 불던 누나가 앉아 있다 공원의 느티나무에서 말매미가 나뭇가지에 핀볼을 굴릴 때면 귀를 괴롭히던 층간 소음도 잠깐 잊는다 애매미의 가창력이 긴 장맛비 사이로 기운차다 수해로 시름에 잠긴 수재민에게 파이팅을 보내는 참이다 참매미가 낭낭하게 ..

글(文) 2020.08.13

가을 소리

가을 소리 ‘나를 잊은 그대에게’ 심야의 자연 방송 가을 노래 첫 음원 발표하는 귀뚜리의 목소리가 장맛비 사이로 전파를 탄다 물 난리를 겪지 않은 주말드라마 속에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집을 찾고 월세 전세 보다 반전세 신접살림 꿈꾸는 귀뚜리의 소야곡 내리는 비(강우)의 리듬을 효과음에 삽입했다 다카포 위치를 잊은 채 아무데나 쉼표 찍으며 에이 단조의 비는 내리고 무선 이어폰도 없이 고막을 연 나의 귓속 달팽이관에는 지구의 자전 소리가 저음으로 깔린다 케이 팝 무대를 보려고 눈을 반짝이는 구름 뒤의 별과 달처럼 상당한 마음의 재난을 예방해야 하는 심야 방송의 청취 현황 전등을 켜고 책상 위에 태블릿 피시를 불러 앉히면 문자로 변환하는 밤의 투명한 음표가 하얀 공백 안에서 가로로 번진다 앨토 음역의 귀뚜리와..

글(文) 2020.08.09

겹 무지개 저녁

오늘 하루 장마가 주섬주섬 돌아갈 무렵 잿빛 구름 징검다리 건너 서쪽으로 가던 해가 도화지 동쪽에다 빨주노초파남보 색칠을 했다 새들과 곤충들이 월세 전세 계약 없이 사는 도시 뒷산에서 임차인 실거주자 어울려 사는 아파트 단지까지 한 번의 붓질로 고운 색동 드리웠다 변하는 계약법 따라 다투지 않고 장맛비 들이치면 창문을 닫고 오늘 같이 그친 비 뒤로 해가 색동칠을 하면 창 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일곱 색 길 따라 오늘의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라 산에 뿌리를 둔 해의 유채색 스케치였다 비번 없이 누구나 로그인하고 바라보게 동서남북 펴 놓은 도화지에 두 줄 나란히 그렸다 곧 지우더라도 불만 없이 고왔다.

글(文) 2020.08.02